뇌과학의 함정
부제를 포함해서 우리말로는 “머리에서 벗어나기: 왜 당신은 당신의 뇌가 아닌가, 그리고 의식의 생물학으로부터의 다른 교훈들”이고, 국내에는 “뇌과학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고 번역은 비교적 양호한 편.
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때 뇌만 볼 것이 아니라 몸 그리고 몸이 놓여 있는 특정 상황/환경, 그리고 뇌/몸/환경의 상호작용을 같이 보아야 한다는 체화된 인지(embodied, environmentally situated mind) 관점을 다루고 있으며, 기존의 관점이나 연구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1) 요즘(2013년 경) 시지각과 데이터 시각화를 공부하고 있는데, Colin Ware가 강조하는 분산 인지 개념을 좀 더 확장하여 자세히 알고 싶었고, 2) 마음에 대한 기존의 인지심리학이나 진화심리학과 다른 관점을 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읽고 나서의 느낌은? 저자의 관점은 내가 조금씩 알고 있던 여러 학자들의 관점과 약간 혹은 많이 달랐다. Cosmides 부부와도 다르고, 대니얼 데닛과도 다르고, |제리 포더랑도 다르고, 존 설이랑도 다르고, J. J. 깁슨, 데이비드 마 등과도 다르다. 심지어는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앤디 클락 하고도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덕분에 많은 소득이 있었고 의식이나 뇌 연구에 대한 생각이 더 확장된 것 같다. (의외로 아마존 서평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서문, 1장, 8장, 에필로그
서문과 1장과 8장 그리고 에필로그는 책 전체의 주장을 요약하는 내용이 반복되고 있어서 한 번에 묶어서 적는다(서평이 나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우선 저자가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분야를 콕 집어서 말하자면 신경과학이다.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로보틱스 등 인지과학의 다른 관련 분야들은 체화된 인지 관점을 점진적으로 수용하고 그로 인해 이런저런 성과를 내고 있는데 유독 신경 과학 분야만은 전통적인 관점을 고수하며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현대의 신경과학이 과거의 골상학이나 별 다를게 없고(대다수의 신경과학자들은 이 표현이 욕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할 것), 100년 전과 비교하여 의식 연구에 있어서 아무런 발전이 없었고, 전혀 검증된 바 없는 미신(의식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에 따르면 프랜시스 크릭의 놀라운 가설에서 유일하게 놀라운 점은 “너무 평범해서 놀라운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은 fMRI, PET, EEG 같은 새 장난감에 푹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고. 특히 1장에서는 뇌영상 기법에 근거한 연구들이 갖는 다양한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저자가 생각하는 의식이란 이러하다:
- 의식은 우리 몸 안의 특정 기관(이를테면 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몸 안에서 의식이 존재하는 곳(locus of consciousness)을 찾으려는 시도는 잘못되었다.
- 소화가 장에서 일어나듯 의식이 뇌에서 일어나는 것(happen)이 아니라, 의식은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행하는 것(something that we do, actively)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비유를 하고 있는데 한 가지는 돈 비유이고 다른 한 가지는 악기 비유이다.
돈의 가치는 돈을 이루는 물질적 구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원, 약속 등이 모두 합쳐져야 의미를 갖는다. 의식도 이와 마찬가지로 뇌만 연구해서 될 것이 아니라, 뇌+나의 과거+현재의 위치+세상과의 상호작용 등에 걸쳐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비유는 악기 비유이다. 뇌는 악기와 같아서 음악이 어떻게 연주되는지를 연구하려면 악기만 보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 그리고 협주인 경우 다른 연주자와 다른 악기, 지휘자 등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의식이 뇌 안에 없다는 식의 주장을 오해하면 “빈서판” 주장과 유사하게 흐를 수 있는데, 악기 비유는 이런 오해를 막아준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기타가 기타의 고유한 소리를 내려면 기타의 고유한 구조가 존재해야 한다. 아무 악기나 기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편, 기타만 있다고 곡이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연주자가 악보에 맞춰 연주를 해야만 한다. 기타 및 기타의 고유한 구조는 뇌와 뇌의 특정한 기능들에 대응되고, 연주자는 몸과 환경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확장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가 비판하는 개념 중 하나는 뇌가 외부 세계에 대한 심적 표상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기존의 계산표상적 이론인데, 망막을 통해 시각 정보가 들어오면 V1에서 이를 처리하여 기본적인 시각적 특성들을 찾아내고, V2-V4를 거치며 패턴을 만들어내고 IT에서는 이에 대한 의미가 부여된 심적 표상을 만들어낸다는 식이다.
fMRI 등으로 뇌의 활성화 패턴을 연구해보면 실제로 눈 앞의 세상에 대응되는 무언가가 뇌 안에서 구성되는 것을 (특히 저수준, 이를테면 V1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악기 비유를 떠올려보면 이 관점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리코더와 같은 관악기의 관 내부의 여러 지점에 풍속계를 달아서 리코더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한다면, 연주자가 불어넣는 숨의 패턴에 대응되는 형태로 관 내부의 풍속이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텐데 그렇다고 해서 리코더가 하는 일이 연주자의 날숨에 대한 내적 표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테다. 날숨에 대한 대응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소리를 내기 위한 부수현상(byproduct)일 뿐이다.
2장. Conscious Life (의식적인 생명체)
여기서부터는 짧게 요약하겠다. 2장의 주제는 의식이 존재하기 위한 하한선은 “배양 접시에 담긴 뇌”가 아니라 몸을 가진 생명체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계산주의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아서 인공적인 의식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다만, 인공의식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인공의 몸을 수반하는 인공 생명의 형태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곁가지로, 샐리-앤 테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 재미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SA test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마음은 숨겨지고 개인적인 것이라 직접적 관찰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드러나는 행동을 통해 믿음과 욕구를 유추해아 하며, 이게 바로 ToM의 역할이고, 아이들에게는 아직 ToM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저자는 아이의 의식에 있어서 부모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부모-자식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는 단일 주체이고 부모는 아이의 자연스러운 심리적 지형의 일부이므로, 어린 아이들은 “개인적이고 관측불가능한 타자의 마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고 해석한다.
3장. The Dynamics of Consciousness (의식의 동역학)
의식은 뇌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이 장의 핵심 주장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본다는 것(Seeing)“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특히 Paul Bach-y-Rita의 감각치환실험을 근거로, “본다”라는 의식적 경험에 있어서 “눈”이나 “시각 피질” 등이 핵심이 아니라,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에게 카메라를 달아주고 카메라의 신호를 신체 일부에 부착된 패치를 통해 촉각 신호로 변환하여 제공하는 경우, “눈”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다”라고 할만한 경험을 하게 된다. 본다라는 감각 모드(sensory modality)는 몸과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특정한 스타일 - 표면에 대한 셈플링만 가능하고, 한번에 한 측면만 볼 수 있으며, 가까지 가면 커지고, 멀리가면 작아지고, 뒤로 돌면 사라지는 등 - 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Supersizing the mind에서 Andy Clark도 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Perceptual experience and sensorymotor dependencies 참고.
4장. Wide Minds (넓은 마음)
4장에서는 3장의 주제를 더욱 확장하고 있다. 환각 사지, 고무손 효과 등을 근거로 몸의 확장을 이야기한다.
고무손 효과를 체험하려면 테이블에 앉아서 한 손을 무릎 위에 놓아 눈에서 안보이게 한 후, 테이블 위에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럴듯한 가짜 손을 올려놓는다. 이 상태에서 테이블 아래의 진짜 손과 테이블 위의 가짜 손을 정확히 동기화해서 자극하면(간지럼, 문지르기, 꼬집기 등) 테이블 위의 가짜 손으로부터 감각이 전해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우리 몸이라고 느끼는 것이 꼭 하나의 신체로 연결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끌어낸다. 맹인이 지팡이를 통해 땅의 질감을 “느낄” 때, 맹인의 지팡이는 확장된 몸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5장. Habits (습관)
앞 부분에서는 일상 생활에서 습관이 갖는 중요성을 역설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다양한 습관을 만들어내며, 습관이 없으면 거의 모든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다는 주장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뒷부분에서는 (어쩌면 당연한데) 습관이라는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이어간다.
이와 관련하여 촘스키 전통의 언어학을 비판하는 내용도 재미있었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촘스키 언어학은 언어의 구체성이나 실제 세상과 밀접한 관련성 등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추상적 기호 체계(abstract symbolic system)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 촘스키 전통의 연구자들이 언어의 그러한 측면을 몰라서 연구를 안한다기 보다 의도적으로 연구의 범위를 좁힌 것(이를테면 심리적 실체성psychological reality에 대해 의도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2000년대 이후 최소주의 혹은 생체언어학 흐름에서는 이게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해봤자 저자 입장에서는 마음에 안들어할게 뻔하다. 왜냐하면 이 변명도 7장에서 시지각 연구의 정보처리 관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논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6장. The Grand Illusion (거대한 환영)
저자가 말하는 “거대한 환영”이란 (저자가 비판하는) 두 종류의 주장을 포괄한다. 첫번째는 좀 전통적인 관점으로, 눈을 통해 실제로 입력되는 정보에 비해 더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뇌가 이런저런 보정을 통해 정보를 보강해주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의 “거대한 환영”을 말한다. 두번째는 좀 극단적인 관점인데, 뇌가 정보를 보강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풍부한 경험”을 하는 것 처럼 느끼는 것 그 자체가 환영이라는 관점(Daniel Dennett)이다.
물론 저자는 두 관점 모두 비판하고 있다. 두 관점 모두 뇌 안에서 심적 표상이 만들어진다거나, 감각 경험이 뇌 안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라는 (저자가 보기에 근거없는) 가정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관점은 감각 경험은 세상에 걸쳐 있는 것이고, 뇌 안에서 심적 표상이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진 세상 그 자체가 표상(The world is its own model)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시각 경험이 풍부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풍부한 접근성이 제공되기 때문이다. 즉 언제는 머리나 눈동자를 움직여서 원하는 부분의 정보를 뽑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이 부분은 디자인을 위한 시각적 사고와 잘 맞는다. 심적 표상 부분은 안 맞고).
7장. Voyages of Discovery (발견을 위한 항해)
7장은 현대의 시지각 연구를 거의 싸그리 비판하고 있다. “싸그리”라고 하면 David Hubel의 수십년에 걸친 연구(노벨상 받았다), David Marr의 Computational vision 등을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구 자체를 비난한다기 보다 연구에 깔려 있는 가정(뇌는 정보처리 기계이다)을 비판하는 것이다.
저자는계산주의 마음이론의 주된 문제는 마음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부터 발생된다(arises)는 가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머리 속에서 행해지는 계산만으로 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고 믿는 점에서는 John Searle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컴퓨터나 로봇에게 의식이 담길 수도 있다고 믿는 점에서는 Daniel Dennett에게 동의하고 있다(2, 3장에서 주장한 바를 고려할 때, 인공 의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인공 환경 및 인공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인공 몸을 필요로 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는 또 Dennett과 다를 것이다).
이 관점에서 D. Hubel의 연구를 살펴보면 좀 비관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저자에 의하면 수십년 간에 걸친 이들의 연구는 “본다는 경험”에 대해 아무런 답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몸과 머리와 눈동자를 고정한 고양이나 원숭이에게 시각 자극을 제시했을(Aperture vision) 때 뇌에서 정보처리(즉 계산)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연구는, (악기 비유로 설명해보자면) 기타의 특정 줄을 탄현했을 때 울림통에서 공기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연구일 뿐, 연주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주는 기타의 울림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즉, 의식은 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타와 연주자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즉, 뇌와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데, 연주자 없이 연주에 대한 연구를 하는 꼴(즉, 몸과 환경 없이 의식에 대해 연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부연
이렇게 끝내면 “모든 위대한 연구를 싸그리 비판하고나서 대안은 꼴랑 하나 ‘we are out of our head’라니,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부연하고자 한다.
저자가 기존 연구에 대해 하는 비판은 “기존 연구를 다 태워버려야한다”류가 아니라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어느날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서 전세계의 모든 의식 연구자가 저자의 관점을 수용했다고 치다. 그럼 기존의 연구들이 모두 무용해지는게 아니라, 하나씩 다시 살펴보며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다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저자의 주장이 그렇게 허망하기만 하지는 않다.
적어도 내게는 기존 연구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몇 가지를 접할 기회가 되었고, 여러가지로 생각이 좀 더 넓어지고 유연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